미국 캔자스시티의 연방준비은행이 매년 개최하는 이 나라 중앙은행가들의 축제가 지난 8월 27~29일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개최됐다. 내년이면 50주년을 맞게되는 이 미팅의 공식 주제는 ‘금융 혁신: 지급결제와 정책에 미치는 영향(Financial Innovation: Implications for Payments and Policy)’이었다. 참석한 패널들은 △스테이블코인, 그리고 △토큰화 예금이 금융 시스템의 기반, 즉 금융의 ‘배관(plumbing)’ 자체를 혁신할 수 있을지를 논의했다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프로그램이 가능한 화폐’가 복잡하고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거래를 보다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 스탠퍼드대의 대럴 더피(Darrell Duffie) 교수는 주장했다. 국경을 넘는 결제를 더욱 원활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이 자리에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원신 두(Wenxin Du) 교수는 기존 금융기술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며, 많은 경우 기존 기술이 더 단순하고 더 저렴하다고 반박했다.
코인보다 국채와 부채가 더 중요
하버드대의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 교수는 많은 참석자를 대신해, 스테이블코인 논의를 사실상 무시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중앙은행가들의 회의에서조차 스테이블코인은 지루한 주제라는 것. 그 대신 로고프는, 국채 수익률과 정부 부채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미국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인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AOC)의 표현을 빌렸다고 한다. AOC는 최근 2020년대 초반의 ‘워크(woke) 1.0’식 사회정의 열풍을 ‘미친 짓(crazy)’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로고프는 이를 빗대, ‘거시경제 워크 1.0(macro woke 1.0)’을 비판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밝혔다. 그가 말하는 ‘macro woke 1.0’은, 당시 금리가 계속 낮게 유지될 것이라는 주장에 기대어 정부가 더 많은 빚을 내도 된다고 주장했던 경제적 논리를 의미한다.
로고프는 과거의 논쟁 상대들을 향해서도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폴 크루그먼이 모든 것에 대해 확신하는 만큼 나도, 무언가 하나라도 확신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는 비꼬았다.
금리는 올랐고, 정부 부채는 사상최고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이제 금리는 올라갔고 정부 부채는 사상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다.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최악에 가까운 조합이다.
첫 번째 위험은 미국 국채가 더 이상 안전자산처럼 행동하지 않을 가능성이다. 코넬대의 에스와르 프라사드(Eswar Prasad) 교수는, 투자자들이 안전성을 얻기 위해 기꺼이 포기했던 이른바 ‘편의수익(convenience yield)’이 사라졌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편의수익이란 투자자들이, 국채처럼 안전하고 유동성이 높은 자산을 보유하기 위해 감수하는 낮은 수익률의 대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안전성에 대한 프리미엄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의 지위는 여전히 강력하다고 그는 봤다. 그리고 스테이블코인과 같은 금융 혁신이 오히려, 달러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더 큰 위험은 ‘정부의 중앙은행 장악’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 수요가 미국 자산에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훨씬 더 큰 두 번째 위험이 있다. 정부의 과도한 차입이 정치권의 중앙은행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로고프는 이 문제를 진보 정치인인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워런의 더욱 진보적인 참모들이 워런을 마치 (보수적인) 로널드 레이건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라고 그는 농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정치적 좌우가 아니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정부 부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중앙은행을 정부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끌어들이려는 유혹이 커진다는 것. 정부가 돈이 필요할 때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거나 △국채를 매입해, 정부의 차입 비용을 낮춰주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미국에서 더 큰 위험이 오히려 워런 같은 진보 진영의 반대편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의 최근 움직임이 이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이다.
또 다른 괴물은 AI
‘macro woke 1.0’이 끝났다면, 그렇다면 ‘macro woke 2.0’은 무엇인가? 로고프가 제시한 답은 인공지능(AI)이 경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강조했다. 캐빈 워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후보로 경쟁할 당시 누구 못지않게 AI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번 와이오밍의 연설에서의 태도는 달랐다고 한다. 그는 AI에 대해 확신에 찬 주장을 하기보다는, 대부분 질문 형태로 언급했다는 것. 그리고 AI의 초기 효과는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높이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암시했다. AI가 데이터센터 투자를 폭발적으로 늘리면서, 막대한 자본이 투입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AI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초기에는 AI 인프라 투자가 너무 빠르게 늘면서, 수요와 물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AI는 금융시장에 더 직접적인 위험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AI는 금융시장에 보다 직접적인 위험도 제기한다. 프린스턴대의 마르쿠스 브루너마이어(Markus Brunnermeier) 교수는, 첨단 AI가 금융시장에 조기에 충격을 주면서 금융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로봇 트레이더가 인간과 AI 사이에서 ‘비대칭적인 이해(asymmetric understanding)’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AI는 인간의 행동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인간은 AI의 의사결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AI가 △왜 특정 거래를 했는지, △어떤 패턴을 감지했는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인간은 알기 어렵다는 의미다.
AI가 예측할 수 없는 중앙은행?
브루너마이어 교수는 여기서 상당히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설명했다. 첫째, AI가 참여할 수 없는 인간 전용 금융시장을 만들자는 것이다. 둘째, AI가 중앙은행의 결정을 미리 예측해 거래에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중앙은행의 정책 결정을 무작위화(randomisation)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대해, 이미 금융시장에는 서로 충돌하는 동기를 가진 인간들이 가득하며, 인간의 행동 역시 상당히 불투명하다고 시카고대의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 교수는 지적했다. 오히려 AI가 인간에게 AI 자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융시장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는 외계의 초지능(alien superintelligence)처럼 작동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내년이면 50주년 맞는 잭슨홀
내년이면 잭슨홀 중앙은행가 회의는 50주년을 맞는다. 정부 부채 문제와 AI의 위험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내다봤다.
한편, 지난달 미팅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인물은 ‘매파(hawk)’로 변신한 케빈 워시 연준 의장이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워시는 취임 초기만 해도 시장의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기자회견에서 모호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듯한 발언을 내놓으면서 시장이 그의 정책 방향을 읽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금리 인하 압력에 맞서 연준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하지만 잭슨홀에서 그는 달라졌다고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했다.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우려스럽지만 △고용시장은 상대적으로 견조하다는 판단을 제시했다는 것. 그리고, 경제 상황에 따라 연준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이른바 ‘반응함수’를 비교적 명확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불확실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행보였다.
그 결과 금융시장은 9월 금리 인상 가능성을 이전보다 높게 반영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밝혔다. 동시에 장기 국채금리가 추가로 급등하지 않으면서 시장의 불안도 다소 진정됐다. 그러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채 수익률은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는 것.
“중앙은행 총재의 말만으로는 시장을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평가했다. 만약 워시가 이번에 보여준 ‘정상적인 중앙은행가’의 모습을 계속 유지한다면, 적어도 그는 이런 문제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신뢰를 조금 더 쌓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잇따랐다. 그리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험난한 산길을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