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산업이 ‘탈 은행화’에서 ‘재 은행화’로 이동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핀테크와 가상화폐 기업들은 은행을 대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최종 목표는 “은행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은행이 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보도했다. 예금·결제·대출·자금조달 비용 측면에서, 은행 인가(Charter)가 압도적 경쟁우위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으로 풀이된다.
NYT에 따르면, 한때 전통 금융권의 “혁신적 파괴자”를 자처하던 핀테크·가상화폐 기업들이 스스로 은행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2기 행정부가 금융 규제를 대폭 완화하면서, 수십 개의 금융 관련 기업이 은행 인가 취득 경쟁에 뛰어들었다.
결제 공룡 페이팔, 선구매 후지불(BNPL)의 선구자 어펌 등을 비롯해, 디트로이트 빅3 자동차 기업인 포드·지엠·스텔란티스(크라이슬러의 모기업), 심지어 트럼프 가문과 연계된 가상화폐 벤처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까지 은행인가 신청 대열에 합류했다고 NYT는 설명했다.
트럼프 2기가 출범한 이튿날,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의장은 “금융업 신규 진입자들을 환영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미국 통화감독청(OCC)은 지난해 14건의 신설 은행 인가 신청을 접수했다. 이는 이전 4년치를 합친 것과 맞먹는 수준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연평균 5건으로 급감했던 신규 인가가 되살아나고 있다. 미셸 알트 클라로스 그룹 파트너는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 당국은 ‘문을 열었다’는 신호를 명확히 보내고 있다”며 “바이든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말했다.
왜 지금 은행인가인가
은행 인가가 없는 기업들은 대출 발행, 자산 보유, 결제 처리를 직접 할 수 없다. 중개 은행에 이를 의존해야 한다. 이 구조는 의사결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수익성을 갉아먹는다.
특히 내셔널 은행의 인가를 받으면 각 주(州)의 금리 상한선 등 소비자 보호 규정을 연방법으로 덮을 수 있다. 미국의 50개 주 전역에 동일한 조건으로 금융상품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인공지능(AI) 기반 대출 플랫폼인 업스타트홀딩스는 지난해 110억 달러(약 16조 6452억 원) 규모의 주택담보·자동차·개인 대출을 취급했다.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이 회사는 AI 알고리즘으로 차주의 신용도를 평가한다.
하지만, 정작 자체적으로 대출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100개 이상의 은행·신용조합 네트워크를 통해야 했다. 이 회사는 올 3월 연방준비제도 감독하의 내셔널 은행 지주회사 전환을 선언했다. 이를 통해 미국 50개 주 전체에 동일한 대출 상품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또한 AI 기반 대출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직접 정책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지위도 확보하게 된다. 앤니 델가도 최고리스크책임자는 “고객 입장에서 심사 승인율 향상과 금리 인하라는 두 가지 혜택을 직접 체감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가상화폐, 제도권 금융으로
OCC는 지난해 말 가상화폐 5개사에 ‘내셔널 신탁 은행(national trust bank)’ 조건부 인가를 부여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리플 랩스와 피델리티 디지털자산이 여기에 포함됐다. 이 인가로, 가상화폐 등 자산의 수탁(커스터디)서비스가 허용된다.
하지만, 일반 예금 수취는 불가능하다. FDIC의 예금보험 적용도 받지 못한다. 파산 시 고객 자산이 전액 손실될 위험이 있다.
미국 내 약 4500개 은행 중 약 1/4은 연방의 내셔널 은행 인가를 받았다. 나머지는 주 정부의 허가와 감독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로 드러난 위험과 대침체 이후, 입법자와 규제 당국은 광범위한 개혁과 안전장치를 도입했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장치들은 축소되고 있다.
OCC의 청장인 조너선 굴드는 블록체인 협회 행사에서 “새로운 인가는 다양한 금융 생태계를 보장한다. 혁신과 경쟁, 공정한 접근이 규제적 정체를 항상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가문 연계 가상화폐 기업 월드 리버티 파이낸셜도 올 초 OCC에 연방 은행 인가를 신청해 이해 충돌 논란을 낳고 있다.
핀테크와 FDIC 예금보험 가입은행을 연결하던 소프트웨어 중개사 시냅스파이낸셜테크놀로지스는 지난 2024년 부실 회계 끝에 파산했다. 10만 명 이상의 계좌가 동결되고, 최소 6000만 달러(약 908억 400만 원)의 고객 자금이 증발했다. 은행 인가 없이 중개사에 의존하는 구조적 취약성이 현실화된 사건이다.
기존 은행권·소비자단체 “위험하다” 반발
전통 은행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미국은행협회(ABA)는 새 인가가 “규제 차익거래(regulatory arbitrage)의 온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역 중소은행을 대표하는 독립지역은행인협회(ICBA)는 OCC가 신탁 은행 인가를 “법적·역사적 목적을 벗어나 확장했다”며 소비자 피해를 우려했다.
100여 개 소비자 단체는 고금리 단기 대출 전문 회사인 에노바와 오프파이의 인가 신청에 반대 서한을 제출했다. 단체들은 “사실상 약탈적 대출을 전업으로 하는 최초의 국가 은행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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