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군사·에너지·식량이 안보 핵심이었지만, 이제는 클라우드·결제망·운영체제·인공지능(AI) 플랫폼 등이 국가 안보 인프라가 됐다. 전 세계 기술 인프라를 장악한 미국은 이제 ‘디지털 킬 스위치’ 작동을 통한 서비스 차단으로 개인과 국가를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다고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지적했다.
유럽을 위시한 각국은 미국의 빅테크 생태계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지정학적 리스크로 부상했다. 이에 대응해 유럽은 비자·마스터카드 대체 결제망, 디지털 유로, 자체 AI·반도체 산업 육성 등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유럽은 아직 미국 수준의 초대형 기술기업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공급망 역시 미국과 깊게 연결돼 있어 탈미국화는 쉽지 않다. AI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미국 플랫폼 의존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한국 역시 미국 클라우드, 모바일 운영체제, AI 모델, 결제망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향후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될 경우, 디지털 주권 확보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 중심 기술 동맹과 중국 중심 기술 블록이 갈라지는 상황에서, 향후 국가들은 군사동맹뿐 아니라 디지털 인프라 동맹에도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업계 관계자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될수록 ‘디지털 자립’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FT에 따르면, 지난 2025년 8월 니콜라 기유(Nicolas Guillou)는 자신이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완전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판사로 재직하면서, 가자지구 전쟁범죄 혐의와 관련해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와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ICC의 다른 판사들도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된 바 있었다.
하지만 기유 판사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제재의 ‘범위’였다고 FT는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는 이런 조치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얼마나 광범위하게 무너뜨릴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며칠 만에 그는 미국 기업에 의존하는 거의 모든 서비스에서 차단됐다. 미국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온라인 거래를 위해서는 현금이나 네덜란드의 국가결제 시스템(iDEAL) 같은 수단에 의존해야 했다.
기유 판사의 은행 송금은 반송됐다. 부킹닷컴(Booking.com)과 익스피디아(Expedia)에 예약한 호텔은 자동 취소됐다. 신용카드 보증이 필요한 파리의 공공자전거 서비스 ‘벨리브 메트로폴(Vélib’ Métropole)’도 이용할 수 없었다. 유피에스(UPS)를 통해 배송되던 택배는 발송인에게 되돌아갔다.
심지어 건강보험사도 그의 보험 서비스를 중단하려 했다. 그는 “기업의 컴플라이언스 부서들이 미국 내 잠재적 불이익을 극도로 두려워한 나머지,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유럽의 정책 당국자들에게 기유 판사의 경험은 더 큰 취약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FT는 분석했다. 미국이 이른바 ‘킬 스위치(kill switch)’를 통해 유럽 사용자들의 미국 기술·결제 시스템 접근을 차단할 경우, 국경 밖의 일상생활까지 얼마나 빠르게 마비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미국이 유럽연합(EU)에 대한 서비스를 끊거나, 서비스 접근권을 다른 정치적 목표를 위한 협상 카드로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은, 한때 황당한 시나리오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 복귀한 이후, 미국의 전통적 유럽 동맹국들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고 FT는 지적했다.
서비스를 무기화하는 것은 단순한 상품 무역 분쟁보다 훨씬 심각한 단계의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과 유럽 양측 모두에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올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유럽과 미국의 경제 관계는 깊은 통합 구조로 형성돼 왔다. 상품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고, 서비스는 반대로 유럽으로 들어왔다. 2023년 EU의 상품 무역 흑자는 1566억유로(약 273조 9325억 5000만 원)였지만, 서비스 부문에서는 1086억유로(약 189조 9685억 5000만 원) 적자를 기록했다.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이런 상호 의존 구조는 이제 유럽 각국에서 ‘보강이 시급한 약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 EU 고위 외교관은 “이 문제에서는 미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으며, 미국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유럽이 미국 서비스에 얼마나 크게 의존하고 있는지를 가리킨다고 FT는 말했다.
이 같은 의존성은 특히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유럽은 10년 넘게 자체적인 대형 기술기업을 육성하려 했지만, 아직 미국 빅테크에 맞설 만한 기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에 따라 유럽의 정책 담당자들은 미국의 기술·금융 대기업을 대체할 수단을 더욱 절박하게 찾고 있다. 현재 이들 기업은 사실상 유럽 경제의 핵심 인프라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일부 특정 분야에서는 유럽이 강점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기업 에이에스엠엘(ASML). ASML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노광장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이 장비는 인텔과 티에스엠씨(TSMC) 같은 제조업체들이 사용한다. TSMC는 다시 엔비디아에 반도체를 공급하고 있다.
미국 역시 유럽에 의존하는 부분이 있다. 유럽 통신장비 업체인 노키아와 에릭슨은 글로벌 이동통신 인프라 구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컴퓨터·통신산업협회(CCIA)의 알렉상드르 루르는 “의존성은 양방향”이라며 “미국이 ASML 같은 유럽 반도체 기업이나 노키아·에릭슨 같은 통신장비 업체와 디커플링하려 한다면, 미국 경제 역시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급망 자체가 깊게 얽혀 있다는 점도 문제. ASML은 미국산 부품에 의존하고 있으며, 전체 직원의 20%가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다. EU 안보연구소(EUISS)의 연구원 요리스 티어는 “겉으로 보면 ASML은 유럽 기업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미국 내 생산 비중도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상호 의존 구조 때문에 갈등이 격화될 경우 비용도 매우 커진다. 유럽이 취약성을 줄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융 분야에서는 유럽 정책 당국이 비자와 마스터카드를 대체할 범유럽 결제 시스템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고 FT는 밝혔다. 유럽 은행 컨소시엄이 추진 중인 한 프로젝트는 “2027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끊김 없는 국경 간 결제”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는 13개국만 참여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추진하는 디지털 유로 프로젝트도 있다. 이는 유로존 21개국 전체에서 법정통화로 인정받는 디지털 화폐를 만드는 구상이다. 하지만 유럽의회 내 논쟁이 치열해 실제 도입은 2029년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유럽의회 경제위원장 오로르 랄뤽은 “우리에겐 ‘결제 분야의 에어버스(Airbus of payments)’가 필요하다”며 프랑스·독일·스페인이 공동 지배하는 항공기 제조사 에어버스를 언급했다. 그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FT에 말했다.
유럽은 또한 자체 기술 역량 강화에도 나서고 있다. 이달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클라우드·인공지능(AI)·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기술 주권 패키지(tech sovereignty package)’를 발표할 예정이다. 다만 미국 기업을 배제하지는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의 정부 관계자와 업계 로비스트들은 유럽이 미국의 전체 디지털 생태계를 완전히 복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AI와 양자컴퓨팅 같은 신기술 분야에서는 전략적 틈새를 선점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루르는 “불편한 진실은 유럽이 10년 넘게 노력했음에도 자체적인 초대형 기술기업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라며 “브뤼셀이 보호주의를 고민하기 전에, 왜 유럽에서 기술기업의 성장과 확장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지부터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부 EU 국가들은 디지털세를 통해 관계 재균형을 시도하고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오스트리아·헝가리·폴란드는 이미 디지털세를 도입했다. 독일·벨기에·라트비아·슬로베니아도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의 보복 가능성과 유럽 소비자 부담 증가라는 부작용이 있다.
독일 재무장관을 지낸 외르크 쿠키스는 “EU가 디지털 서비스에 과세하려 할 때 가장 큰 문제는 AI·소셜미디어·클라우드 등 핵심 디지털 산업에서 유럽의 대안이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그는 “유럽의 디지털 서비스 수요는 가격 탄력성이 낮기 때문에, 디지털세로 인한 가격 인상 부담은 결국 유럽 소비자와 기업이 떠안게 된다”고 설명했다.
더 위험하지만 강력한 선택지는 미국 빅테크 기업의 유럽 시장 접근을 제한하는 것. 미국 기술기업들은 유럽의 4억5000만 소비자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올해 그린란드 위기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무력으로 가져가겠다고 위협하자, 다수의 EU 국가들은 ‘반 강압수단(Anti-Coercion Instrument)’ 발동을 선호했다고 외교관들은 전했다. 이 조치는 속칭 ‘바주카포’라고 불리며 서비스 수입 제한까지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EU 내부도 의견이 갈린다. 프랑스는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반면, 독일 등은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유럽 시민들과 정책 결정자들은 이제서야 미국 기술기업과 디지털 서비스에 대한 유럽의 의존 규모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AI 혁명이 본격화될수록 이런 의존성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라고 FT는 강조했다. 컴퓨팅 능력, 사용자 접근성, 기존 데이터 측면에서 미국이 훨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
헤이그의 ICC 판사 기유는 “우리는 이런 시스템에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며 “스스로 통제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자신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고 FT에 말했다.
권선무 기자
[ⓒ데이터저널리즘의 중심 데이터뉴스 -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