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회계사, 컨설턴트 등 전문직의 ‘타임 차지’ AI가 없앤다”

WSJ, “로펌 등은 성과 중심 수임료·구독 모델 등으로 생존 전략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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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펌, 회계법인, 컨설팅사 등의 서비스 제공에 대한 ‘시간당 청구(Billable Hour)’ 제도가 존폐 위기에 몰렸다. 인공지능(AI)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변호사나 회계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투입한 시간을 기준으로 비용을 산정하는 관행은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라고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현재 로펌이나 회계법인, 컨설팅사에서, 전문직들은 일한 시간이 길수록 더 많은 돈을 벌어왔다.

WSJ에 따르면, AI가 ‘지루하고 힘든 일’을 대신함에 따라 변호사 등 전문직들은 이제 ‘투입된 시간’이 아니라, ‘결과’에 대해 비용을 청구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AI의 역량이 가속화됨에 따라, 제공된 가치가 아닌 투입된 시간에 대해 비용을 청구하는 근본적인 논리가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 서비스의 기본 비즈니스 단위인 ‘시간당 청구’는 너무나 흔한 관행이어서, 이것이 1960년대와 70년대에 보편화된 비교적 최근의 혁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어렵다고 WSJ는 짚었다. 그 이전에는 많은 변호사와 전문가들이 시간이 아니라, ‘달성한 성과’나 ‘제공된 서비스’ 자체에 대해 비용을 청구했다는 것.

WSJ에 따르면, 시간당 청구의 씨앗은 1900년대 초 레지날드 헤버 스미스라는 젊은 변호사가 뿌렸다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그는 빈민들에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스턴 법률구조협회’에서 재직하는 동안, 변호사들을 위한 시간 추적 시스템을 도입했다. 비용 청구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정된 예산을 가진 팀의 효율성을 개선할 방법을 찾기 위해 변호사들이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 추적하고자 했다.

스미스는 1919년 협회를 떠나 ‘헤일 앤 도어’ 법무법인에 합류한 후에도, 경영 도구로서의 시간 측정을 계속 옹호했다. 법조계는 결국, 시간 기반 시스템이 서비스 비용을 청구하는 데 있어 더 공정하고 투명한 방법이라고 믿으며 이를 고객 청구용으로 채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법률 업무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증진하기 위해 시작된 노력이 이제는 되레 ‘폭압적’ 제도가 돼 버렸다. 수익 극대화를 위해, 시니어 파트너와 주니어 어소시에이트 모두가 시간을 늘리도록 유도해 온 것. 이는 로펌에서 회계법인, 컨설팅사 그리고 대부분의 전문 서비스 기업으로 퍼져나가, 가치 교환의 지배적인 메커니즘이 됐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바뀔 처지에 놓였다고 WSJ은 지적했다. AI 시스템이 △수천 건의 계약서를 몇 주가 아닌 몇 분 만에 검토하고, △복잡한 문서의 초안을 몇 시간이 아닌 몇 초 만에 작성하며, △전략적 분석을 거의 즉각적으로 생성해 낼 때, ‘시간’이라는 요소는 거의 무의미해진다. 더 근본적으로는, AI가 일상적인 인지 업무를 처리하게 되면 남은 인간의 기여는 △판단력, △창의성, △관계 관리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가치는 투입된 시간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경제적 불합리성은 명확하다. AI를 가장 성공적으로 도입한 기업일수록 더 효율적으로 우수한 결과를 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당 청구 방식을 고수한다면, 매출은 급감하게 되는 역설이 발생한다. ‘가치 창출’과 ‘수익 창출’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는, 시간당 청구 제도의 종말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고객들은 시니어 전문가의 통찰력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주니어 인력의 교육 시간까지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에 항상 불만을 가져왔다. 이제 그들은 기업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미안하지만, 주니어 직원의 시간 비용으로 하루에 수백 달러를 지불할 수는 없다”.

전문 서비스 기업들의 딜레마는, 익숙한 피라미드 모델이 그들의 모든 업무 방식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다는 점. 대대적인 재고가 필요하다고 WSJ은 주장했다.

‘가치 기반의 가격 책정(Value-based pricing)’은 이에대한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이는 투입된 시간이 아니라, ‘달성된 성과’나 ‘제공된 가치’에 비용을 직접 연동시키는 방식. △로펌은 거래의 성공적 완료에 따라, △컨설팅 회사는 측정 가능한 비즈니스 개선에 따라, △회계법인은 제공된 재무적 통찰력의 품질과 전략적 가치에 따라, 그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 

이 모델은 효율성과 혁신에 불이익을 주는 대신, 보상을 제공한다. 어려운 점은, 양측이 ‘무엇이 공정한 가치인가’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는 것.

‘구독’ 및 ‘고문’ 모델은 또 다른 길을 제시한다. 이는 고객에게 전문 지식과 역량에 대한 지속적인 접근 권한을 제공하고, 고정된 주기적 비용을 받는 것. AI를 통해 기업이 고객에게 더 지속적이고 선제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때, 이 접근법은 특히 효과적이다. △로펌은 지속적인 컴플라이언스 모니터링과 자문 서비스를, △컨설팅 회사는 지속적인 전략 정보와 분석을 제공할 수 있다.

시간당 청구의 종말은, 전문 서비스 기업의 조직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소수의 리더(상층부)에서 다수의 직원(하층부)으로 권한이 내려가는 피라미드 구조를 유지하는 대신, 이들 기업은 더 평평하고 유연한 구조로 바뀔 수 있다. 소수의 시니어 전문가 핵심 그룹이 고객이나 프로젝트에 따라, 필요시 팀과 기술을 조합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어떤 경우든, 프리미엄은 기록된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통찰력과 연결(insight and connection)’에 붙게 될 것이라고 WSJ은 주장했다.

권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