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에서는 전력 대란, 해저 케이블 절단, 통신탑 파손 등으로 사회 기반시설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특히 인터넷 인프라는 지나치게 집중돼 있고 상호 연결돼, 단순한 사이버 공격이나 물리적 손상으로도 광범위한 경제와 사회 시스템이 쉽게 마비될 수 있는 취약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특히 인터넷 네트워크의 안정성이 가장 큰 문제라며, “유럽의 많은 기업과 공공 서비스가 인터넷에 과도하게 의존하지만, 백업 체계와 위기 대응 계획은 부재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기업은 비용 절감 중심에서 벗어나, 위기 상황에서도 필수 서비스가 유지되는 회복탄력성 강화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분산형 네트워크, 다중 백업 체계, 위기 대응 훈련이 국가안보 차원의 필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2018년 케이티 아현지사 화재는 서울 중심부의 인터넷·모바일·카드결제 서비스를 마비시켰다. 음식점·상점은 카드 결제를 받지 못해 영업이 불가능했고, 금융 거래까지 차질을 빚었다. 단일 국사의 화재 하나로도 수도 서울이 통신 암흑지대가 됐던 것. 2021년에는 서울 지하철 일부 구간에서 통신망 장애가 발생해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승객 불안이 확산됐다. 공공 교통 시스템조차 정보기술(IT)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통신의 작은 오류에도 사회 혼란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FT에 따르면, 이미 전력 대란을 통해 단순한 사이버 공격만으로도 경제의 광범위한 영역이 마비될 수 있다고 드러났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광범위한 지역을 강타한 전력 대란은, 디스토피아적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몇 시간 동안 외딴 지역에 기차가 멈춰 서고, 이동통신망이 마비되며, 학교와 상점이 암흑에 잠겼다. 이와 유사한 지역적 정전은 히스로 공항, 스웨덴의 전략적 거점인 고틀란드 섬에서도 발생했다. 우려되는 러시아발 파괴 공작 가능성이 커진 시대의 불안은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유럽 인터넷 네트워크’의 취약성이 전력에 못지않게 심각하지만, 대중에게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기업과 공장, 많은 공공 서비스, 그리고 소비자들까지 상상하지 못한 피해를 입게 된다.
스웨덴의 글로벌 인터넷 인프라 운영기관 넷노드(Netnod)의 보안 책임자 파트릭 팔스트룀은 이렇게 말한다. “IT 인프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서로 연결돼 있다. 어쩌면 전력보다도 더 그렇다.” 넷노드는 기업과 정책 결정자들이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단순한 사이버 공격만으로도 경제의 광범위한 부문이 쉽게 마비될 수 있다고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많은 기업들은 턱없이 준비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FT는 지적했다. 최근 공격을 받았던 한 유럽 기업의 전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말했다. “IT는 IT 부서의 전담 업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이버 공격으로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알게 됐다. 평소에는 효율적으로 IT를 운영했지만, 문제가 터지자 모든 게 무너졌다.” 그 회사는 며칠간 사실상 마비됐고, 정상화에는 몇 달이 걸렸다.
최근 발트해 데이터 케이블 절단 사건, 스웨덴 전역의 통신탑 파손 사건 등 연속된 사보타주는 유럽이 전쟁과 평화의 경계선에 놓였다는 불안을 고조시키고 있다. 사회와 기업의 회복탄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개별 조직이 비용 중심으로 인터넷과 IT를 조달하는 현재 방식을 넘어야 한다. 각 기관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도 핵심 서비스를 어떻게 유지할지 정부와 기업이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
넷노드는 북유럽 최대 인터넷 교환소를 운영하며, 분쟁국가의 인프라 지원 경험도 갖고 있다. 팔스트룀은 특히 사용자들이 주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가 마비됐을 때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기계 작동이나 노인 돌봄 식품 배송처럼 많은 기업과 공공 서비스가 인터넷과 깊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고 FT는 지적했다.
더 근본적인 취약성도 존재한다. 스웨덴의 경우, 핵심 인터넷 인프라는 스톡홀름에 집중돼 다른 지역으로 뻗어 나가는 구조다. 팔스트룀은 “스웨덴의 네트워크는 스톡홀름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이는 많은 나라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이는 적대 세력이 제한된 공격만으로도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매력적인 목표’가 된다고 FT는 밝혔다. 더욱 두려운 점은 수도·방송·전력망 같은 사회의 핵심 기능들조차, 이 취약한 인터넷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2022년 러시아의 전면적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각국은 ‘영원한 평화’라는 환상에서 서서히 깨어났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방위 분야 외에는, 사회적 회복탄력성 확보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전력 대란이 보여주듯, 위기 상황에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추가 비용을 지불하려는 사고 자체가 결여돼 있다는 것.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급망 위기가 기업들로 하여금 제조망 강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했듯, 이번 교훈도 더 폭넓게 적용돼야 한다고 FT는 강조했다. 팔스트룀과 전문가들은 인터넷 인프라나 다른 분야에서 ‘다음 사건’이 발생하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권세인 기자
[ⓒ데이터저널리즘의 중심 데이터뉴스 -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