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다 간다 나는 간다/ 에이야라 술비야/ 울릉도로 나는 간다/ 에이야라 술비야/ 오도록 만 기다리소/ 에이야라 술비야/ 이번 맞고 금 쳐놓세/ 에이야라 술비야/ 술비여어/에헤에 술비여어 어루야/ 에헤어루 술비야/ 에이야 술비야/ 에야 디디야라 술비야 돛을 달고 노 저으며/ 에이야라 술비야/ 울릉도로 향해보면/ 에이야라 술비야/ 고향생각 간절하네...”
거문도 뱃노래 무형문제화 ‘술비소리’ 한 대목이다. 이 노래는 역사적 가치가 아주 크다. 거문도 뱃사공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울릉도와 독도는 프랑스령 아니면 일본령이 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들은 500km나 되는 그 먼 바닷길을 오가며 뱃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해류와 바람의 방향 등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거문도는 해마다 봄에 타이완 동쪽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일본을 거쳐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의 중심에 있는 섬이다. 고대부터 동아시아 뱃길의 중요 거점이다. 이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해류와 계절풍을 타고 욕지도와 부산 절영도와 포항을 거쳐 울릉도와 독도로 향했다. 또 하늬바람이나 마파람이 부는 시월 초순에 갔다가 겨울을 보낸 뒤 올 때는 이월 중순에 이나 높새바람을 탔다. 해류와 바람만 잘 타면, 빠르면 며칠 만에 울릉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울릉도로 갔을까. 거문도는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오로지 해산물로 영위해야 하는 섬이다. 그들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환상의 섬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울릉도는 태종때부터 ‘쇄환정책(1417년~1883년)’으로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눈치 보지 않고 어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가 지천이어서 새 배도 건조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이었다.
이들이 울릉도에 가 선박건조와 어로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후반부터로 확인되고 있다. ‘비변사등록’은 물론 프랑스 라페루즈탐험대의 보고서(1787년),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1850년), 일본 군함 아마기(天城)보고서, ‘조선수로지’(1899년) 등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또 1890년 고종은 거문도 오성일(吳聖鎰)를 울릉도감(군수격)에 임명했다. 거문도 사람인 그를 울릉도감으로 임명했을까? 그가 올린 건의서가 계기가 됐다. 그는 우리 땅인 울릉도에서 왜인들과의 갈등 상황을 건의한 것이다. 고종은 그를 도감에 임명하고, 다시 개척령을 내렸다. 같은 해 이규원의 울릉도감찰일기를 보면 울릉도 체류자는 조선인 140명, 일본인 78명 그 중 전라도 출신이 115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거문도인 김윤삼씨와 박운학씨는 생전 1962년 ‘민국일보“와 이규태 ’조선일보‘ 기자와의 각각 인터뷰를 했다. 이들은 1903년까지 올릉도와 독도를 오고간 사실을 증언했다.
“서해에서 쌀과 곡식을 가득싣고 남해를 거쳐 동해를 거슬러서 원산까지 가서 명태 등 해산물과 바꿔 싣고 돌아오는 물물교환 무역을 했다. 여덟 아름이나 되는 규목(느티나무)을 베어 도끼로 다듬고, 나무못을 박아 배를 만들어 미역과 전복을 따 싣고 배꽁무니에 집질 나무뗏목을 달고 왔다. 보물섬 울릉도 내왕 반년치 양식을 한 번에 얻을 수 있었다. 또 독도는 온통 돌바위로 되어 있는데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돌섬은 큰 섬 두 개 그리고 작은 섬이 많이 있는데 큰 두 섬 사이에 뗏목을 놔두고 열흘 남짓 있으면서 가제(海狗)‘도 잡고 미역, 전복 등을 땄다.”
일본 외무성통상국(1902년)과 농무성(1903년) 자료에도 거문도배 20척이 미역 채취하러 왔고, 배를 새로 만들어 순천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본 마고오리(摩郡) 유노츠(溫泉津)에 표착했다고 기록돼있다. 우리 ’통상휘찬(通商彙纂)‘ 50호에는 1904년 독도물개잡이 경쟁이 심해진 기록이 나온다. 박운학씨는 “강치잡이를 위해 독도에 다녀온 것이 1904년”이라며 “나라가 어수선해 그 후에는 돌섬에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갑오경장 이후 일본이 독도를 자신들의 섬으로 점유한 이후에는 가지 못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거문도 어부들이 독도에 가서 물개잡이를 한 이유는 값이 나가는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물개 기름과 신은 아주 귀한 품목이었다. 당시 물개 기름은 불을 밝힐 수 있는 값나가는 귀중품이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이 독도를 실효 지배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은 1800년부터 80년간 울릉도에 관리를 보내지 않았고, 독도는 조선인의 관심 너머에 존재하는 상상의 바위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러한 억지 주장은 1693년 안용복과 박어둔이 울릉도에서 납치되어 일본에 갔다왔고, 그리고 3년 후 안용복과 뇌헌 (여수 흥국사)스님 등 11명이 울릉도와 독도를 경유, 도일(渡日)해서 두 섬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돌아오지 않았는가. 문제는 국내에는 이러한 일본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친일파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19일 2박3일 일정으로 거문도를 다녀왔다. 필자는 거문도가 어디에 붙어있는 섬인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거문도가 19세기 말 제국주의 강대국의 전쟁터였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러시아군이 전략적 요충지 확보를 위해 내려오고, 이를 막기 위해 영국 해군 수백명이 2년 가까이 불법 주둔하고, 청나라 제독(정여창)이 출동해 철군을 요구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집단거주 마을까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거문도란 이름도 정여창이 이곳 사람들의 뛰어난 학문에 놀라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한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독도학자 정태상박사와 황용섭 박사 등과의 동행은 여간 영광이 아니었다. 이들은 무늬만 독도전문가들과는 사뭇 다르다. 정 박사는 김수희 교수(영남대 전 독도연구소 연구교수)에 이어 거문도인의 울릉도 도항에 대해 수편의 논문을 썼다. ’거문도인의 독도 도항‘ ’안용복 2차도일서 순천승 뇌헌의 역할‘을 써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위 내용 역시 정박사의 논문에서 나오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전문가들은 가장 큰 문제로 김대중 정부가 한일간의 독도를 아예 없는 섬으로 규정, 울릉도와 오키도 섬 사이에 그것도 독도 위쪽까지 한일어업공동수역으로 협정을 맺은 점을 꼬집었다.
이는 독도를 사실상 한일공동섬으로 인정한 것이며, 특히 독도 위쪽으로 까지 경계선을 공동수역으로 설정한 것은 일본 측에 더욱 명분을 주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독도는 울릉도 부속 섬이다. 일본이 태정관지령 등 각종 정부문서에서도 ’독도=한국땅‘이라고 공식화돼있다. 김대중정부가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어 말도 안 되는 협정을 맺어 불씨를 키웠다. ’실효지배‘하고 있어 걱정 없다는 주장이 많다.
국제법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 스스로 ’실효지배‘를 ’점유‘로 만들어 놓고 무슨 소리인가. 더구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런 협정은 국제법상 30년이 지나면 국제법상 한국이 일본 주장을 묵인한 유력한 증거로 원용될 수 있다고 한다. 3년마다 협정을 갱신해야한다. 그런데 정부마다 다음 정권에 ’폭탄돌리기‘를 하고 있다.
이번엔 윤석열 정권이 폭탄을 이어받았다. 1998년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은 점을 고려할 때 6년 후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자위대가 독도를 점유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윤석열 정부 어깨에 지어진 무거운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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