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뉴스=오창규 기자] '독도는 한국 땅’ 홍보 전도사로 알려진 호사카 유지(保坂 祐二) 세종대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비판한 정태만 인하대교수와 시민단체대표, 가정주부 등 6명을 무더기로 고소했으나, 검찰은 이에 대해 지난 3일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정 교수 고소 건에 대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홍성기 검사는 명예훼손과 협박 모두 ‘혐의 없음’ 결정 내렸다.
이 중 한 가정주부는 “호사카씨가 일본 국익에 반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일본에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지, 가수 이승철은 독도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고 일본에 못 오게 하는데...”라는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달았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홍주 흥사단 독도수호본부 공동대표는 자신이 고소당한 사실도 모른 채 지난 7월 86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대일평화조약과 관련된 일본 측 주장과 그 비판’이라는 논문을 통해, 호사카 교수는 잘못 번역된 ‘영국초안’을 ‘미국초안’으로 단정하는가 하면 ‘독도=일본땅’으로 곡해하는 우(愚)가지 범했다고 지적했다. 이석우 교수가 ‘동아시아의 영토분쟁과 국제법’(집문당,2007)에서 번역을 잘못해 ‘독도=한국령’을 ‘독도=일본땅’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을 검증 없이 그대로 논문에 인용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이 교수의 책에는 번역 실수에도 불구 주석에서 미국무성에 보관돼 있는 '영국초안'임을 명시했다”면서 “호사카 교수가 원문만 확인했어도 이런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호사카 교수는 “이석우 교수의 책에는 미국 국무성이 작성한 초안 중 하나로 1951년 4월 7일의 초안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한 것으로 언급되어 있으므로 제가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며 “제가 일부러 조작했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문제”라고 반박했다.
정 교수는 러스크 서한과 관련, 호사카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비판해왔다. 미국이 한국측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지 독도를 일본에게 주기위해 거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은 1951년 4월 7일자 영국초안을 일본에게 제시하여 의견을 들은 후 영국과 협상을 거쳐 독도를 언급하지 않은 영미합동초안을 만들었고, 7월에 한국에도 영미합동초안을 보내어 의견을 들었다. 이때 한국정부는 조약에 독도를 한국령으로 명시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8월 10일 미 국무성 러스크 차관보 명의의 비밀 서한(러스크 서한)을 통해 이를 거부했다. 며칠 후 8월 13일 독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체 조약초안을 확정하고,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 48개국간에 역사적인 조약조인식이 이뤄졌다.
▲일본영역참고도(1951년 8월 해상보안청, 왼쪽)와 일본영역도(1952년 5월 每日신문사, 오른쪽)의 독도부분
이에 관련, 정 교수는 “호사카 교수는 ‘미국이 독도를 한국땅으로 명시하지 않은 것은 일본에 주려고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데 그것은 말도 안된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막판에 ‘독도=한국령’ 표기를 하지 않으려 한 주된 이유는 조약에 개별섬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조약을 체결하기로 미국이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때 같은 연합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냉전체제로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이지, 호사카 교수 주장처럼 일본령으로 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오히려 미국은 조약마감 한달 전에 독도를 한국령으로 하려고 검토한 흔적이 많다고 주장했다. 미 국무성 보그스가 피어리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1951년 7월 13일과 16일 두차례나 독도를 한국령으로 할 것을 검토했음이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리앙쿠르트(독도)는 1949년 조약초안에서 일본이 한국에 청구권을 포기하는 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외무성 출판물인 1947년 6월의 ‘일본의 부속소도’에는 리앙쿠르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약초안에 동 도서를 다음과 같이 명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그리고 리앙쿠르트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청구권을 포기한다”(미 국무성 내부 보고서 7월 13일) 는 보고서를 근거로 제시했다.
또 정 교수는 논문에 따르면 ‘대일평화조약 5차 초안’(1949.11.2)까지 독도는 한국령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는 “1951년 7월 19일 주미대사 양유찬과 덜레스의 면담에서도 덜레스는 독도가 병합전에 한국의 영토였다면 독도를 한국 영토로 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면서 “특히 독도가 일본땅이 된다는 말을 미국이 일본에게 했다면 어떻게 1951년 10월 일본에서 샌프란시스코조약을 비준할 때 일본정부 스스로 ‘독도=한국땅’으로 그린 지도인 ‘일본영역참고도’를 조약의 부족지도로 국회에 제출했겠는가? 일본은 친절하게도 독도동쪽에 특별히 반원까지 그려 한국령으로 설명해주었다”고 강조했다.
한편 호사카 교수는 최근 자신을 비판한 정 교수에게 공개토론을 제의했다가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교수는 “호사카 씨가 신문기고를 통해 공개토론 제안을 했다가 취소했다”면서 “상대방이 그 공개토론 제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수락했는데도 불구 즉각 응하지 않고, 기자도 없이 공개를 가장한 비공개토론을 제안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 교수는 또 “호사카씨는 어떻게 해서든 공개 토론을 회피하면서도, 공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은 책임은 나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며 “그런 식의 토론을 사양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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