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달러 패권’이 저물고 있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지만, 여전히 전 세계의 투자는 미국으로 집중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중국·사우디아라비아 등이 미국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다만, ‘달러 투자법’은 바뀌고 있다.
겉으로는 달러의 세계적 위상이 약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중앙은행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은 하락하는 반면, 각국의 ‘숨은 해외투자 자금’이 미국 주식과 기업으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들 국가가 금융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 국채 같은 안전자산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제는 연기금·국부펀드·국유은행 등을 앞세워 미국 기업의 주식과 기술기업 지분에 적극적 투자하고 있다.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것보다, 미국 기업의 성장에 베팅하고 있는 것.
이코노미스트는 “그러나 해외자산과 자국 경제가 지나치게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며 “특히 한국 경제는 이미 자국 반도체 기업을 통해 인공지능(AI) 붐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만큼, 미국의 AI 관련 주식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을 피하라”고 조언하고 나섰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한국이 보유한 해외자산 대부분은 1997년 외환위기의 고통을 겪은 이후, 단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 운용됐다. 원화의 방어가 그것이다.
2016년이 되자 한국은행은 약 4000억달러(약 537조 2000억 원)에 달하는 달러, 유로 등 외화와 금을 쌓아놓았다. 이런 순외환보유액은, 필요할 경우 매각해 자국 통화 가치를 떠받칠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이 보유한 전체 해외자산의 약 80%를 차지했다. 금융정책은 다음번 위기에 대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그 위기는 오지 않았다. 해외자산은 계속 늘어났지만, 대신 그 이유는 달라졌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한국의 외환 보유액은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한국의 가장 큰 해외 투자자는 중앙은행이 아니다. 정부가 소유한 연기금인 국민연금(NPS)이 한국의 최대 해외 투자자로 올라섰다는 것.
국민연금의 해외자산은 현재 약 6500억달러(약 873조 2100억 원)에 달한다. 2012년 약 800억달러(약 107조 4720억 원)에서 크게 늘어난 액수다.
한국은 이제 외환보유액만이 정부의 중요한 금융 방어수단인 국가가 아니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설명했다. 일본,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등도 한국과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이들 국가의 정부는 △공적연금, △국부펀드, △국유은행 등의 포트폴리오를 통해 해외자산을 축적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공투자기금(PIF)처럼, 일부 기관은 초고층 빌딩이나 스포츠 대회 등에 화려하게 투자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이들 연기금의 부상에는 금융시스템 측면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중요한 의미도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짚었다. 이 새로운 투자자들은 중앙은행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 더 높은 수익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는 각국 정부가 보유한 거대한 해외자산을 시장 변동성에 더 많이 노출시킨다는 것.
외환보유액은 원래 ‘비상용’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국가는 과거 외환보유액을 방어적인 목적으로 쌓았다.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외화를 비축한 것이다.
이후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국가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수출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자국 통화가 너무 빠르게 절상되는 것을 막으려면, 중앙은행이 자국 통화를 팔고 외화를 사들여야 했다. 그 결과 해외자산이 계속 쌓였다.
그 규모가 워낙 커지면서, 이 자산을 한꺼번에 모두 현금화할 필요도 없어졌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밝혔다. 따라서 해외자산 전체를 현금과 비슷한 자산이나 금으로 보유할 필요가 없었다.
외환보유액 관리자는 단순히 위기 대비라는 ‘마음의 평안’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수익률도 추구할 수 있게 됐다. 보다 위험한 증권에 투자하는 것이다.
중앙은행도 국채만 사는 시대에서 벗어나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안토닌 셰나르, 배리 아이켄그린, 에릭 모네, 플로리앙 모르빌리에 등 네 명의 경제학자가 6월 발표한 연구는 1950~2022년 109개 중앙은행을 분석했다. 연구 결과, 이 기간 말에는 중앙은행 외환보유액의 평균 거의 2/3가 증권 형태로 보유되고 있었다.
2000년 무렵에는 그 비중이 약 1/3에 불과했다. 즉 중앙은행 외환보유액 자체도 점차 단순한 예금이나 현금성 자산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증권으로 이동한 것이다.
정책당국 입장에서는 이것이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유가가 치솟고 △인구가 고령화되며 △정부 지출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해외자산에서 나오는 투자수익은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익률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공격적인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관리자라도, 투자등급 이하의 위험한 채권이나 자산까지 적극적으로 투자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연기금·국부펀드·국유은행은 훨씬 공격적
반면, 다른 형태의 정부 투자기관들은 이런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국유은행은 위험도가 높은 대출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
연기금은 정크본드(투기등급 채권)에도 투자한다. 국가의 비상자금이나 국부펀드는 주식을 사고 심지어 기업을 인수하기도 한다. 2014~2025년 중국·일본·사우디아라비아·한국의 연기금과 국부펀드가 보유한 해외자산은 최소 3조5000억달러(약 4699조 8000억 원) 증가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말했다.
같은 기간 전 세계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 증가폭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세계 중앙은행 외환보유액은 2001년 약 2조달러(약 2686조 2000억 원)에서 2014년 11조6000억달러(약 1경 5579조 9600억 원)로 급증했다.
중국·일본·사우디에서도 같은 현상
미 외교협회(CFR)의 브래드 세처 연구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의 최대 국유은행 7곳은 중국 인민은행보다 빠른 속도로 해외자산을 늘렸다. 이들 은행이 보유한 해외자산은 약 3조5000억달러(약 4702조 2500억 원)에 달한다. 이는 중국 인민은행의 외환보유액과 비슷한 규모다.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지난 10년 동안 약 1조달러(약 1343조 5000억 원) 수준에서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연금투자기금(GPIF)의 해외 보유자산은 2014년 약 4000억달러(약 537조 4000억 원)에서 2026년 약 1조달러(약 1343조 5000억 원)로 증가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펀드 PIF 역시 중앙은행 외환보유액에 근접한 수준의 해외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영향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이처럼 전통적인 외환보유액 이외의 해외자산이 증가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이 자산을 주로 파는 나라는 어디인가? 미국이다.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고 일부 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달러의 비중은 2001년 71%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해 현재 약 57% 수준이다.
하지만, 각국 정부가 보유한 다른 달러 자산까지 포함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달러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미국에 대한 투자비중은 각국 중앙은행보다 새롭게 등장한 국부펀드와 국유은행 대부분이 더 높다고 브래드 세처는 추정한다. 예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PIF 해외 포트폴리오의 약 80%, 중국 5대 국유은행의 해외자산 중 약 70%는 달러 자산에 투자돼 있다.
미국 국채에서 미국 테크주로
변한 것은 외국인의 미국 자산에 대한 관심 자체가 아니다. 어떤 미국 자산을 사느냐가 달라졌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주장했다.
기존 외환보유액 관리자는 미국을 주로 초 안전자산인 미 국채 때문에 선호했다. 그러나 수익을 추구하는 연기금과 국부펀드, 국유은행은 미국 기업들 특히 테크기업이 만들어내는 막대한 이익에 끌리고 있다.
2026년 7월까지 12개월 동안 미 국채에 대한 외국인 수요는 약해졌다. 하지만, 외국인은 미국 주식과 펀드 지분을 사들이는 데 사상 최대 규모의 자금을 투입했다. 한국의 국민연금도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미국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미국 경제에서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외국인의 자금은 △미국 정부의 자금조달 비용은 높이는 반면, △미국 기업의 자본조달 비용은 낮추는 효과를 낳는다. 즉 외국 정부의 자금이 미국 국채시장보다 미국 기업과 주식시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외환보유액’의 새로운 위험
이러한 변화의 또 다른 결과는 해외자산을 보유한 국가 자체에 나타난다. 새로운 투자는 과거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위험도 가져온다.
전통적인 외환보유액은 △유동성이 높고 △안정적이며 △경기와 어느 정도 반대로 움직이는 특성이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고있다. 세계 경제가 침체하면 일반적으로 달러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반면, 주식이나 스타트업, 초고층 빌딩 같은 자산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새로운 형태의 해외 포트폴리오를 운용할 때는 해외자산과 자국 경제가 지나치게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한국이 더 많은 해외자산을 보유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이미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을 통해 AI 붐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AI 관련 주식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조언했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