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금융 산업의 오랜 성벽을 허물고 있다. 과거 소비자들이 귀찮음 때문에 돈을 옮기지 않던 ‘관성의 시대’가 AI 에이전트의 등장으로 막을 내릴 조짐이다. 메타가 선보인 AI 비서 ‘뮤즈(Muse)’가 시장에 충격을 던지면서, 월스트리트의 은행과 증권사 주가가 일제히 곤두박질쳤다고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메타의 AI 에이전트 ‘뮤즈’ 앱은 사용자를 대신해 금융 계좌를 관리하고, 더 높은 예금 금리를 찾아 자금을 자동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 시장 관계자들은 “AI 에이전트가 소비자의 ‘금융 관성’을 깨뜨릴 경우, 은행과 증권사가 누려온 값싼 예금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제는 이 같은 우려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의 개인 저축률은 지난 4월 2.6%까지 떨어져 2022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은퇴를 위해 돈을 모으던 베이비붐 세대가 이제는 저축을 헐어 쓰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금융 기관의 예금 기반은 구조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여기에 에너지 가격 상승까지 겹쳐 가계의 저축 여력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고금리 장기화도 금융사들을 압박하고 있다. 2022년부터 시작된 연준의 긴축 기조로 예금 금리가 높아지면서, 은행들은 고객에게 더 높은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케빈 워시 연준 의장은 최근 “기저 인플레이션이 목표치로 충분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며 추가 긴축 가능성을 시사했다. 시장에서는 연내 한 차례 더 금리 인상이 단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
WSJ에 따르면, 기술 발전으로 예금 유치 경쟁이 여러 측면에서 치열해지고 있다. 요즘 금융주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금융회사들이 △고객의 현금을 얼마나 잘 유치하고, △또 얼마나 오랫동안 붙잡아 둘 수 있느냐인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현금은 투자할 가치가 없는 자산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고 WSJ는 설명했다. 흔히 쓰이던 표현대로라면, ‘현금은 쓰레기(cash was trash)’였다는 것.
기준금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시절에는 예금 계좌와 단기 미국 국채, 머니마켓펀드(MMF)의 수익률이 매우 낮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대차대조표를 확대해 은행 시스템에 지급준비금을 공급하던 때에는 은행들이 예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특별히 애쓸 필요도 없었다고 WSJ는 밝혔다. 그저 양동이를 들고 기다리기만 하면, 예금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2022년부터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서, 현금성 자산으로 얻을 수 있는 수익률의 기준 자체가 바뀌었다. 케빈 워시 미 연준 의장은 연준이 제공해 온 막대한 유동성을 축소하는 방안을 언급해 왔다. 시장은 이제 금리가 더 오랫동안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여기에 기술 발전과 새로운 형태의 금융·화폐가 더해졌다. △인터넷전문은행, △스테이블코인, △토큰화된 미국 국채, △상장지수형 미국 국채 상품 등이, 현금을 유치하기 위한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했다고 WSJ는 지적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경쟁자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수익률이 낮은 곳에 있던 현금을 수익률이 높은 곳으로 옮기는 일도 점점 더 쉬워지고 있다.
이번 주에도, 메타 플랫폼스의 인공지능(AI) 에이전트 ‘뮤즈(Muse)’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금융시장은 다시 한번 불안해졌다. AI 에이전트가 현금을 더욱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
만약 AI 에이전트에 “가장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는 곳을 찾아줘”라고 지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지금까지 금융회사들을 보호해 왔던 고객들의 관성적인 거래 행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번 주, 메타 주가는 11% 넘게 급등했다. 하지만, KBW 나스닥 은행지수는 약 3% 하락했다. 찰스슈왑과 엘피엘(LPL)파이낸셜 주가는 지난 화요일에 각각 6% 넘게, 7% 넘게 떨어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제이피(JP)모건체이스, 웰스파고도 같은 날 3% 넘게 하락했다. 다른 은행과 증권사, 자산관리회사, 대형 증권중개회사들의 주가도 동반 약세를 보였다.
이들 금융회사는 공통점이 있다고 WSJ는 분석했다. 고객의 현금을 받아 보관하고, 그 현금을 운용해 수익을 얻는다는 점이라는 것.
올해 들어 은행주들은 때때로 금리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주된 이유는 예금 조달 비용이 상승할 수 있다는 우려다. 은행은 대출금리가 오르면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은행 경영진들은 애널리스트들에게 예금 고객에게도 더 높은 금리를 지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해 왔다.
현금은 가상자산 규제 법안인 ‘클래리티 법안(Clarity Act)’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핵심 쟁점이었다. 스테이블코인 보유자에게 ‘보상(rewards)’을 지급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가상자산 업계와 은행권 사이에 치열한 로비전이 벌어졌다.
은행들은 스테이블코인 보상이 은행 예금에 지급되는 이자와 경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금융회사의 종류가 무엇이든 고객의 현금을 유치하고 유지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줬다.
미국의 저축률 하락도 한 요인이라고 WSJ는 짚었다. 미국의 개인 저축률은 4월 2.6%로 떨어졌다. 이는 2022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JP모건체이스의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번 주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해 2월부터 9월 사이 저축률이 0.5%포인트 낮아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산했다.
은퇴를 위해 저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동안 모은 자산으로 생활하는 단계에 접어들면서 압박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사람들이 계좌에 있는 돈을 소비한다고 해서, 은행 시스템 전체의 예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금의 형태와 보관 장소는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용이 낮은 입출금 계좌에서 금리가 더 높은 상업은행 계좌로 돈이 이동할 수 있다. 그 계좌는 소매업체가 운영하는 금융회사의 계좌일 수도 있다.
저축이 부족해지면, 소비보다 저축을 유도하기 위해 더 높은 수익률을 제공해야 한다. AI 투자 붐은 채권 발행을 늘리고, 은행 대출 증가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저축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커지고, 시장에서 자금의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는 균형금리가 상승할 수 있다.
WSJ에 따르면, 소비자 행동도 변하고 있다. 컨설팅회사 사이먼-쿠처앤파트너스(Simon-Kucher & Partners)가 최근 미국 은행 고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12%는 주거래 은행 계좌를 단 하나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 비율은 2029년까지 20%로 높아질 수 있다고 회사는 전망했다.
사이먼-쿠처의 압둘 바티 수석 디렉터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결과 고객들은 전반적으로 금리 변화에 더욱 민감해진다.”
은행과 증권사들도 이에 대응하고 있다고 WSJ는 밝혔다. 한 가지 방법은 고객의 저렴한 현금을 운용해 상당한 수익을 얻는 기존 사업 모델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수수료에 의존하는 사업 모델로 전환하는 것.
예를 들어, 로빈후드 마켓츠는 ‘골드(Gold)’ 서비스에 가입비를 부과한다. 골드 가입자는 투자하지 않고 계좌에 남겨 둔 현금에 대해 연 3.6%의 수익률을 제공받는 등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또한 2022년부터 수년간 높은 금리가 유지되면서 증권사들은 이미 계좌에 방치된 현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 왔다.
트루이스트증권의 데이비드 스미스 애널리스트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번 제로금리 시대와 비교하면 대부분의 증권사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낮아졌다. 현금은 이미 더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는 상품으로 옮겨갔다.”
현금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은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이 경쟁은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WSJ는 강조했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