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코스피가 2025년 초 이후 18개월 만에 3배 이상 폭등하며, 닷컴 버블 시절 나스닥의 상승 속도마저 앞질렀다. 상승의 핵심 동력은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폭증이 두 기업의 실적을 사상 최대로 끌어올린 결과다.
골드만삭스·제이피(JP)모건 등은 이번 랠리가 닷컴 버블때와 달리 실적 기반이라 더 지속 가능하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다만, 상승세가 두 종목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고 나머지 종목은 소외됐다는 우려도 나온다. 두 기업의 합산 시총은 한국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섰으며, 개인 투자자들의 대거 귀환과 ‘빚투’ 급증이 시장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한국의 주요 주가지수인 코스피는 18개월이 채 안 돼 3배 이상 올랐다. 이는 닷컴 버블 절정기에 나스닥 종합지수가 같은 수준에 도달하는 데 걸렸던 기간보다 6개월 빠른 속도다. FT에 따르면, 이는 한국의 수백만 개인 투자자들이 코스피에 거액을 쏟아붓고 있는 결과다.
이 랠리는 2025년 초부터 시작됐다. AI 하이퍼 스케일러(초거대규모의 데이터센터 운영사)의 메모리 반도체 수요 폭증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견인하고 있다. 삼성전자 주가는 올들어 약 130% 상승했다. SK하이닉스는 거의 170% 급등했다.
코스피가 올해에만 72.6% 오른 가운데도 투자은행들의 낙관론은 여전하다고 FT는 설명했다.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JP모건은 최근 코스피 목표 지수를 일제히 상향 조정했다는 것.
FT에 따르면, 이번 한국 증시 강세장과 가장 유사한 사례는 1990년대 말 닷컴 버블이다. 당시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은 2000년 초 정점에 달하기 전까지 2년 만에 3배로 뛰었다. 나스닥은 1998년 초 1574포인트에서 5132포인트까지 올랐다. 코스피는 지난해 초 2401포인트에서 출발해 19일(화) 기준 7272포인트를 기록했다.
애널리스트들은 현재 한국 증시 랠리가 더 지속 가능하다고 평가한다고 FT는 밝혔다. JP모건 프라이빗뱅크의 아시아 주식 전략가 카메론 추이는 “닷컴 버블은 순전히 밸류에이션 배수(멀티플)에 의해 주도됐다. 하지만, 이번 랠리는 지금까지 실적 성장이 주축”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이익 성장과 주가 상승 모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집중돼 있다는 점은 변수다. 코스피 급등에도 불구하고, 한국 주식은 현재 더 나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로베코의 아시아태평양 주식 헤드 조슈아 크랩은 보고 있다. “이익 기준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꽤 저렴해 보인다. 바로 그것이 이 시장을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라고 그는 말했다. “지금이 지나치게 과열된 버블이라고 단정짓기 어렵다. 이 상황이 앞으로 3개월, 6개월, 아니면 12개월 더 이어질 수도 있다”고 그는 밝혔다.
서울 소재 자산운용사인 차파트너스의 전무 에이치케이 김은 “두 종목을 제외하면, 나머지 시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기술주들이 시장 유동성 대부분을 빨아들이는 바람에 이른바 가치주들은 오히려 부진하다”고 진단했다.
FT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합산 시가총액은 현재 약 2조 달러(약 3018조 6000억 원)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 추정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1조 9300억 달러(약 2912조 9490억 원)를 웃돈다. 노무라의 아시아태평양 주식리서치 공동 헤드 씨더블유 정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올해 합산 영업이익이 60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번 랠리를 이끄는 메모리 반도체 섹터는 역사적으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사이클 산업이다. 글로벌 AI 인프라 구축 수요가 이 산업의 본질적 성격을 바꾸고 있다고 일부 애널리스트와 투자자들은 주장한다. 골드만삭스의 아시아 주식·지수 전략가인 알빈 소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전형적인 메모리 사이클이 아니다.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FT에 말했다.
한국 주식의 전반적 밸류에이션은 이익 대비 여전히 저렴하다고 FT는 강조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코스피의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8.6배로, 에스앤피(S&P)500의 21.2배에 비해 크게 낮다. 상장 한국 기업의 절반가량이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으로 거래되고 있어, 주가가 장부가치 이하에 머물고 있다.
정부의 지배구조 개혁 드라이브가 이어지면서, 하반기에는 중소형주들이 상승세를 탈 것으로 에이치케이 김 전무는 FT에 전망했다. 정부 여당은 PBR 1배 미만 기업들이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 통과를 추진 중이다. “한국 시장의 더욱 균형 있고 지속 가능한 랠리를 위해서는, 반도체 섹터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는 중소형주 전반의 재평가도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올해 랠리의 또 다른 동력은 오랫동안 미국 주식을 선호했던 한국 내 개인 투자자들이 다시 한국 내 시장,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식으로 귀환한 것. 공무원 배성훈(53)씨는 “반도체 주식 말고는 대안이 없다. 나머지 포트폴리오는 다 손실”이라며 “반도체는 업황의 상승 사이클이 계속될 것 같으니 계속 보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FT에 따르면, 이른바 ‘개미’ 투자자들의 물밀 듯한 매수세는 한국 주식의 변동성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세종시에 사는 직장인 한 모씨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며 “2021년 서울 집값이 급등했을 때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사람들은 순식간에 부자가 됐고, 그냥 전세로 산 사람들은 빈털터리가 됐다”고 말했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