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투자은행(IB)에서 ‘엑셀 신동’으로 불리던 기술형 인재들(nerds)이 이제는 자신들을 대체할 인공지능(AI)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들이 수행하던 ‘재무 모델링(financial modelling)’ 업무 등의 일자리는 AI에 의해 빠르게 자동화돼, 사라지고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칼럼에서 지적했다.
이에따라 기존의 도제식 피라미드 구조가 흔들리며, ‘매니징 애널리스트’ 같은 새로운 중간형 역할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금융권에서 임직원의 역할은 설득·관계 중심으로 이동,정확성과 근면성보다 판단력·소통력·스토리텔링 능력이 더 중요해질 전망이다.
오픈AI가 골드만삭스, 제이피모건 등 출신의 전직 IB 은행원 100여 명을 시간당 150달러(약 21만 6885 원)에 고용해, AI가 IB의 핵심 모델링 업무를 학습하도록 훈련시키고 있다고 FT는 블룸버그를 인용해 보도했다. 역설적인 건, 이들이 과거 같은 일을 할 때보다 훨씬 높은 시급을 받고 자신의 ‘대체자’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 연봉 20만 달러(약 2억 8918만 원)를 받는 주니어 은행원은, 주 80시간 근무의 기준 시급이 약 50달러(약 7만 2295 원)에 불과하다.
지난 수십 년간, IB의 인력은 너드 위주였다. 말 잘하고 사교적인 대신, 엑셀과 파워포인트에 능한 기술형 인재들이 대거 채용됐다. ‘이상적인 주니어’는 할인현금흐름(DCF)을 온갖 방식으로 계산하고, 불안정한 임원의 지시에 따라 새벽에 프레젠테이션을 수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레, 영국쪽 IB에서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 인문학도보다는 유럽 본토의 경영대 졸업생을 더 많이 채용했다. 이는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기술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확성, △회복탄력성, △데이터베이스 숙련도가 보상받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AI가 이 질서를 흔들고 있다. AI가 몇 초 만에 수천 개의 시나리오를 계산할 수 있다면, ‘정확도’나 ‘체력’은 경쟁의 핵심이 더 이상은 아니다. 대신, IB 고위직이 전통적으로 중시해온 △판단력, △신뢰성, 그리고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스토리텔링 능력’이 다시 주목받게 된다. 즉, 과거의 ‘쇼 호스(showhorse, 외향적 영업형)’가 다시 ‘워크 호스(workhorse, 기술 사역형)’를 앞설지도 모른다.
이 변화는 하룻밤에 일어나지 않는다. 복잡한 금융 작업의 자동화에는 수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단순 업무는 점진적으로, 그러나 결국 급격히 사라질 것이다. 이는 은행뿐 아니라, 그들을 인재 양성소로 삼아온 사모펀드와 헤지펀드에도 영향을 줄 것이다.
IB의 구조는 언제나 ‘도제 시스템(apprenticeship)’에 기반했다. 즉, 수년간 고된 일을 견뎌, 결국 최고경영자에게 조언하는 자리에 오르는 식이다. 그러나 이 ‘하위 단계’가 사라진다면, 구조 자체가 불안정해진다.
AI에게는 ‘고객 감정 읽기’나 ‘직관’이 없다. 모든 시나리오를 모델링할 수는 있지만, ‘사람의 방 분위기’를 읽을 수는 없다.
역설적이게도 지금까지 IB가 가장 높게 평가해온 특성, 즉 △세밀함, △24시간 대응력, △극단적 근면성은 바로 AI가 가장 쉽게 복제할 수 있는 능력들이다. 기계는 소수점을 잘못 찍지 않고, 병가를 내지도 않으며, 주말 결혼식 때문에 이탈하지도 않는다. 기계에게는 ‘친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말보다는 숫자를 앞세운 너드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대체할 AI를 훈련시키는 아이러니가 펼쳐지고 있다.
이는 주니어 은행원의 ‘멸종’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FT는 주장했다. 다만 ‘재정의’(reinvention)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매니징 애널리스트’같은 새로운 역할이 등장해, △AI의 결과물을 검증하고, △가설을 테스트하며, △그 의미를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 모델링 기술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핵심은 ‘실행’에서 ‘감독과 소통’으로 옮겨갈 것이다.
심지어 시니어 임원들도 안전하지 않다고 FT는 경고했다. 기존의 피라미드 구조는 수많은 주니어가 분석을 떠먹여주는 방식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AI로 보강된 소수의 팀이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다면, 고비용 구조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
클라이언트들도 ‘비대한 인력’을 감당하는 수수료를 더는 원치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소형 부티크 은행이나, 신규 진입자가 수혜를 입을 수 있다.
앞으로는 IB에서 AI가 자문업무의 ‘분석·계산’을 맡고, 인간은 ‘설득력과 관계 관리’에 더 집중하게 될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그조차도 AI가 배울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끈기와 희생 위에 세워진 업계가 이제 ‘끈기 자체’를 외주화하는 시대”를 목도하고 있을 뿐이라고 FT는 밝혔다.
권세인 기자
[ⓒ데이터저널리즘의 중심 데이터뉴스 -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