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계율과 정진이 거듭되는 산사에서, 승려들에게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음식이 있다. ‘승소(僧笑)’, 국수다. 탐식을 경계하는 불가에서 별식으로 국수가 상에 오르는 날이면, 선방의 팽팽한 긴장감도 잠시 풀어진다.
전국 24개 산사를 찾아 스물네 명의 승려가 끓여낸 국수와 그 속에 깃든 인생의 서사를 담은 신간 ‘스님의 맛’(모과나무)이 출간됐다. 저자인 장보배 작가는 절집 공양주였던 외할머니를 따라 산중 암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템플 스테이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산사의 풍경과 사람들을 기록해 온 이다. 책은 레시피 모음집을 넘어, 국수 한 그릇을 매개로 인연과 수행,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만든다.
“팽팽한 마음을 조율하는 제도 밖의 자유”
넷플릭스 ‘셰프의 테이블’로 세계적인 사찰음식 열풍을 일으킨 정관 스님은 책 속에서 국수를 가리켜 “긴장된 자기 마음을 조율해주는 힘”이라고 말한다. 책에 등장하는 그의 능이 배추 칼국수는 이 책의 메시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음식 가운데 하나다.
정관 스님이 음식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연의 재료를 살리고, △음식에 대한 욕심을 덜어내며, △먹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가 머무는 전남 장성 천진암에는 최근 프랑스 셰프들이 찾아와 장 담그기와 사찰음식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들이 가장 크게 놀란 대목은 맛이 아니었다. ‘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한 프랑스 셰프는 한국의 사찰음식에서 재료를 모두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책에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이 면면히 이어진 덕조 스님의 ‘불일암 국수’, △제철 쑥의 향기를 담은 주호 스님의 ‘쑥 칼국수’, △이색적인 ‘수박동치미 국수’ 등 사찰마다 색다른 사연을 품은 24가지 국수가 등장한다. 조미료 대신 제철 재료의 본질과 발효 장류의 감칠맛을 살려낸 국수들은 지친 현대인의 속을 다정하게 감싸 안는다.
맛보다 오래 남는 것은 사람, 그리고 서사
‘스님의 맛’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음식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출가하던 날의 아스라한 기억, 스승과 제자가 나누던 깊은 선문답, 절망의 문턱에서 스님이 건넨 따뜻한 국수 한 그릇에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던 이들의 이야기까지. 국수 가닥에 얽힌 삶의 서사는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동화 스님은 ‘들깨 칼국수’를 끓이며 “자기를 낮춰야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소박한 부엌 한구석에서 배고픔을 달래고 마음을 닦는 공양간은, 결국 타인을 향한 자비와 온기가 피어나는 치열한 수행의 공간이다.
넘쳐나는 음식 속의 ‘먹는 마음’을 묻다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음식 속에 살아가지만, 역설적으로 자주 허기를 느끼고 마음은 메말라간다. 더 자극적이고 화려한 것을 찾기에 바쁜 세인들에게 책은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나누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
각 장의 끝에는 가정에서도 손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레시피가 실렸다. 바쁜 일상에 지쳐 팽팽하게 매여 있던 삶의 끈을 잠시 풀고, 따뜻한 국수 한 그릇으로 영혼의 허기를 채우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다정한 위로일 수 있다.(장보배 지음 | 260쪽 | 모과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