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처리장치(GPU)와 연산력(컴퓨트)이 새로운 금융상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공지능(AI)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과거 석유·부동산처럼 GPU와 컴퓨트도 파생상품, 담보채권 등으로 금융화되고 있다.
새로운 핀테크 기업들이 GPU 관련 지수, 옵션, 거래소를 구축하고 있다고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이에따라 AI투자에 대한 위험 분산과 활성화, 가속화 등 긍정적 효과가 예상된다. 관건은 GPU의 급격한 구식화 속도를 어떻게 금융적으로 헤지하느냐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AI의 금융화가 이제 막 시작됐다. AI를 기초자산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증권, 헤지, 담보의 시대가 오고 있다.
올해 미국의 5대 빅테크 기업들은 AI에 필요한 데이터센터 구축에 힘입어 7000억 달러(약 1012조 5500억 원) 규모를 자본지출 할 예정이다. 투자자들은 오래전부터 “데이터는 새로운 석유”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석유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쓰도록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비교하자면, 지난해 전 세계 석유·가스 산업의 탐사와 생산 투자액은 5700억 달러(약 824조 5050억 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데이터—혹은 그것을 저장하고 조작하는 GPU—는 여전히 석유에 비해 뒤처져 있다.
GPU는 금융시장에서는 아직 미미한 역할만을 맡고 있다. 일부 대출의 담보로 쓰이긴 하지만, 가격 산정과 유통이 어렵기 때문이다. GPU 파생상품(derivatives) 시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GPU 가격 폭락 등에 대비하는 거래를 막는다.
따라서 GPU와 그 컴퓨트는 월스트리트가 금융화할 새로운 자산군이 될 준비가 돼 있다. 과거 원유, 주택, 기타 자산이 그러했듯 말이다. 이를 실현하려는 신흥 금융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원크로노스(OneChronos)라는 핀테크 기업이다. 2016년에 설립된 이 회사는 6월까지 ‘컴퓨트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을 출범시킬 계획이다. 경매 설계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밀그럼이 공동 설립한 옥셔노믹스(Auctionomics)와 손잡았다. 또 다른 스타트업 오른(Ornn)은 엔비디아의 에이치(H)100을 비롯한 칩 가격을 추적하는 지수를 만들어냈다. 물리적 GPU 가격 하락 시 이익을 주는 풋옵션(매도선택권) 상품 판매를 추진 중이다.
이처럼 신뢰할 수 있는 지표(index)와 유동적인 파생상품 시장이 결합되면, GPU 묶음으로 담보화된 채권이 가능해진다. 개별 대출채권으로 구성된 주택저당증권처럼 말이다. 투자자들 대부분은 캘리포니아 소비자나 오하이오 상업용 부동산시장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신용카드 채권이나 상업용 모기지 담보채를 사들인다. GPU도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장애물도 크다. 가장 큰 문제는 첨단 칩의 빠른 가치하락. 더 강력한 신제품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향후 4년 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오라클의 GPU 감가상각액이 6800억 달러(약 983조 4160억 원)에 달할 것으로 모건스탠리는 보고 있다. 하지만, 기술 진보 속도를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 이 수치는 매우 불확실하다.
이는 GPU 담보 대출을 사들인 투자자에게 큰 리스크로 작용한다. 최신 GPU와 10년 전 모델을 비교하면, 마치 초음속 제트기와 마차를 비교하는 수준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설명했다.
또한, 컴퓨트 거래에는 지역 제약이 따른다. 사용자들은 데이터센터 근처에 있어야 한다. 컴퓨트는 석유와 달리, 쉽게 운반할 수 없다. 그 결과 지역별 가격차가 크고, 공급과 수요를 맞추기도 어렵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했다.
하지만 이런 장애를 극복하면, GPU 금융화의 보상은 막대하다. 예컨대 특정 칩이 갑자기 무용지물이 되는 위험을, 파생상품으로 분산시킬 수 있다. 그 위험을 감수할 의사가 있는 투자자에게 넘기면 된다.
이 덕분에 GPU에 의존하는 기업들은, 기술의 급격한 구식화에 덜 불안해하고 사업에 집중할 수 있다. 반대로, 컴퓨트 자원을 많이 쓰는 신생기업은 GPU를 담보로 대출받기 쉬워진다. 나아가, 이를 묶어 채권화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본격적인 금융화는, GPU의 △혁신 광풍과 △급격한 가치하락 우려가 다소 진정돼야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 기업들은 낙관적이다. 경쟁국, 특히 중국이 과학기술 성과를 따라잡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금융공학(financial engineering)에서는 여전히 미국이 우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이코노미스트는 강조했다.
AI 시대의 하드웨어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금융 인프라’의 중요성은 종종 잊히기 쉽다. 그러나 리스크를 △가격화, △묶음화, △이전화 할 수 있는 능력은 막대한 강점이다. 이는 자본을 열고, 차입비용을 낮추며, 산업 전체의 성장을 가속화한다. 서방의 금융공학자들은 이런 일을 매우 잘 해왔다.
GPU가 금융상품이 될 수 있다면, 월스트리트는 GPU를 반드시 금융상품으로 만들 것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밝혔다.
권선무 기자